By RACCUN

일본군의 만행 치치시마 포로 '식인사건'


사진: google.com, 편집: dachshund of dram



제2차 세계대전에 있던 실제 사건이다. 1945년 2월에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발생했던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중 하나로 기록 되고 있고 오늘날에는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으로 불려지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식량이 있는데도 포로를 잡아 먹는 사건 이다.  오가시와라 제도에 치치시마 식인사건...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1943년 6월 해군장교로 임관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다. 해군 조종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당시 '만 19세' 그 때 당시 미 해군의 최연소 조종사였다.


그는 폭격기 조종사로 태평양 반면에 배치되어, 1944년 9월 2일 오가사와라제도 쪽 으로 폭격을 나가게 되었다. 


제 51 뇌격대의 일원으로 출격한 부시 중위의 애칭은 '바바라'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 전 미국 퍼스트레이디 바바라 여사, 전 부시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 이름 이다.


폭격을 나갔던 부시는 8000피트 상공으로 쏘아 대던 일본군의 대공포에 명중해서 그가 타고 있던 폭격기는 추락하게 되었고 부시는 가까스로 낙하산을 타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사진: google.com, 편집: dachshund of dram


구명정은 굉장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면서 위치를 가르쳐준 덕분에 그는 수영으로 안전한 범위로 갈수 있었고, 일본군 함정 두척이 그를 잡으로 쫓아 왔지만, 이를 본 미군 폭격기가 제압을 했다. 부시 중위는 가까스로 3시간 만에 치치시마 앞에 표류하고 있따가 미국에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게 된다.



그때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에 폭격을 나간 미군기에 탑승한 조종사는 총 8명정도 되고 그중 유일한 생존자가 부시 중위이다.


전 부시 미국 대통령이 1946년 7월생 이기에, 만일 이때 부시 전 대통령이 구조되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잡아먹혔다면, 전 부시 미국 대통령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진: google.com, 편집: dachshun of dream 죽어서도 지옥에 평생살기를


치치시마 식인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 1890년 2월 ~ 1947년 9월


이 사악한 만행을 저지른 위 사람이 최고 지휘관이 사람이 미군의 포로를 학대 시키고 처형 그리고 식인까지 직접 지휘했던 사이코이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 8명을 총검이나 죽창으로 마구 찌르고 용수철채찍으로 때리며 악질 안좋은 고문을 한 후 포로의 가슴과 배를 가르고 간, 내장 허벅지의 살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치바나 중장과 마토바 소령은 잔인한 성격으로 평소에도 둘 관계는 굉장히 친한 사이 였다고 한다. 1947년 1월 도쿄재판에서 로비슨 검사가 일본군의 전시 만행을 밝히기 위해 제출한 마토바의 진술에서 식인 망행이 시작된 그때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치치시마 일본군에 발견된 일기 내용 식인 사건은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 났었다. 

그 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나가서 다치바나 장군에 '미국 군인 비행사 시에요시부대에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았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하라고 해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일부 부대에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말이 있은 뒤였다. 가토 다케무네 대령이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했다. 그래서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뭔가 육류와 술을 준비할 방도가 없냐고 물었다. 장군은 내게 미국 군인을 처형에 대해 물어보면서 인육을 가져 올수 없겠냐고 했다. 그래서 인육과 술 한되를 준비했다. 인육은 가토 대령 방에서 요리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먹어야 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치바나 요시오는 미국 군인 고기가 너무 질기다고 위안부들이 인육을 가져오라는 희대의 망언 했다.  



괌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부대 최고 지휘관이 관여해서 직접 인육을 먹으라고 지시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일본내에서도 치치시마 섬이 유일하고 그때 당시 최고 지휘관이 었던 다치바나 요시오는 마토바에게 이런 구두 명령을 내린다. 


대대는 처형된 미국 군인 조종사를 인육으로 먹어라 그리고 간 중위는 그 인육을 배급을 담당하고, 사카베 군의관은 처형에 입장해서 처형된 미국 군인의 장기를 적출해라 


그때 당시 열악한 군비와 부족한 식량으로 태평양의 크고 작은 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이 기아에 허덕이다가 인육을 먹었다는 것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전후 도쿄재판의 기록 1946년 12월 11일에 의하면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에서 제 18 군사령부가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고 이를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이 처벌을 받아 처형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치치시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부족이 아니었다.  그때 당시 치치시마 식량상황을 보아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어들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좋았다. 이걸 볼 때 치치시마에서는 기아 때문에 아니라 술안주감으로 포로를 잡아 먹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일본이 패후


일본이 패전을 하고 1949년 9월 2일, 치치시마 섬에도 미국군이 상륙을 했다. 9월 3일 다치바나 중장과 모리 중장이 대표로 미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을 했다. 


항복교섭에서 미국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국 군인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다. 그리고 교섭에 나갔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거짓말을 쳤는데, 그에 대하여 미국 대표인 스미스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포시했으나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 놓은 상태였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어 놓고 전 부대원에게 침묵할 것을 지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토바 부대의 귀환은 자꾸 지연이 되었다.


사실 그 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에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1946년 2월 초, 마침내 세퍼 미국군 소령은 호리에를 불러 '잔학행위의 수괴는 육군 다치바니와 마토바 그리고 해군의 모리와 요시이가 아닌가??' 하고 다그쳐 물었다. 


곧 이어 일본군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 였다. 


5월 부터 9월까지 괌에서는 군사재판이 한참 열리고 있었다. 치치시마 식인사건 관련 피고는 다치바나 중장 이하 25명이었는데, 토라크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붐용으자는 모두 63명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치치지마의 살인사건이 가장 주목을 끌고 있었다.


사진: google.com


심리중 당시 상황에서 대한 증언이 이어졌는데, 특히 다치바나의 당번병이 인육을 먹던 일본군의 주연 상황을 묘사하면서, 다치바나가 '맛있다, 한 접시 추가' 라고 했다고 증언하자 법정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고 한다.



미국 군신문인 괌 뉴스는 연일 카니발리즘 식인풍습 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 했다. 일부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사라졌다. 신문에서도 어디가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그 사정을 미국군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 기제가 금지 되었다고' 답변이 돌아왔다. 


전쟁에 참여한 미국군의 희생된 어머니들이 '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믿은 아들이 그런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니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기사가 실리지 않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탄원했기 때문이다.


재편 결과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령, 이토 중령, 요시이 대령, 나카지마 대위에게는 사형이 선고가 되었고 모리 중장과 가토 대령,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을 받았다. 


해군의 가미우라 소령은 구류 중 자결했고,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근체 야산에서 자결했다.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재판을 받은 사카베 군의관은 4년 형을 선구 받았고 이들중 사형이 선고된 5명은 사형집행일이 다가오는 순간 까지 미국 군 헌병들에게 마구 구타당했고 5명중 2명은 사형집행일이 오기전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GHQ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다치바나가 수감된 곳은 간수를 담당했던 미국 군 헌병들이 그들을 매일 두들겨 팼으며, 심지어 같이 수감되어 있던 일본 장군 4명에게도 매일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자기 들도 전범 이지만 자기들은 그냥 전쟁 범죄자인 반면 저놈은 아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도 된다는 이유였다. 


마지막


요시이 시즈오 해군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요시이 대령은 마지막 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무차별 폭격을 한 미국 군에 조종사가 더 나쁘기 때문에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고 말했다.


인육은 전의 고양과 사기진작을 위해 먹도록 했다. 모든 명령은 내가 내렸으므로 부하들에겐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태복음을 인용하여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마라 고 이야기 했다고


요시이 대령은 결국 화가 많이 난 미국 헌병들에 의해 알루미늄 배트로 죽을 때까지 숨을 끊어질 때까지 뼈가 80개이상이 부러지고 금가고 상황에서 제발 그만 때려 아파 너무 아파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이 미국으로 부터 주권을 되돌려 받은 뒤 일본내에서 전범들에 대한 명예회복운동이 벌어졌ㄷ고, 이 과정에서 A급 전범을 제외한 B, C 전범들이 일괄 으로 무죄로 석방 조치를 받으면서 다오바나 요시오까지 무죄로 처분을 받아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범이 아니긴 커녕 일부 내부의 법적인 처분만 전범이 아닐뿐, 국제적으로 당연히 전범으로 분류 되어있다.


다치바나 요시오 중장은 에헤메 현 호국신사에 있는 순국 22열사의 비에 이름이 올라가 있고 영령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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